초벌고추

내 몸은 귀한 몸
여름 햇살을 누리며 자랐다.
​푸른 멍울이 붉어지기까지
여름의 불덩이를 이고
땀을 꿀처럼 삼켰다.
​매운 맛은 그리 쉽게 오지 않았다.

수많은 손길 거쳐
내가 닿은 곳은
낯선 도시의 할머니 품이었다
그녀의 알뜰함이 겨울을 준비할 때,
나도 방앗간에 눕기 전
한 톨의 습기까지 말려야 했다.

하지만 귀한 몸도 한 순간.
어처구니없는 노인의 실수로
고추 꼭지가 모두 잘려 나가는 순간,
나는 천덕꾸러기로 추락했다.
하늘은 연일 소나기를 쏟아내고
내 몸은 습기에 젖어 무력해졌다.
그 시련 속에서
나의 공주병은 서서히 지워졌다.

붉은 고추에서 붉은 가루로 바뀐 내 몸은
풀죽은 배추를 만날 날을 기다린다.
그날,운명처럼
김치 속에서 버무려지는 순간,
마침내 나의 첫날밤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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