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오 순례 여행기
- 시인: 정명자
- 작성일: 2025-08-20 15:49
마카오 순례 여행기
정명자 권사
2025년3월31일. 마카오 선교여행팀은 새벽 3시30분에 교회주차장에서 출발하였다. 차창가에 다가가 보니 바닷가 위에 달덩이 같은 어마어마한 천지창조 신기한 신새벽 둥근 해가 떠오르고 있다. 인천공항은 멀기도하다.
정준 목사님의 인솔로 인천공항에 가고 있다. 드디어 홍콩 마카오 일정이 시작되었다. 심성 고운신 어느 집사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63년 만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말씀을 자세히 들어보니까 자랑스럽기도 하였다. 남편이 퇴직후엔 나와 함께 선교여행을 약속했지만 마카오 여정에 함께 하지 못해 애잔함이 남아있던 참이었는데, 마침 옆자리에 앉은 마음씨 착한 정권사는 “남편이랑 왜 함께 오시지 않았어요?” 하고 따뜻한 위로의 마음을 전해준다.
오전 7시 5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교통수단은 시내버스와 호텔버스를 이용했다. 알뜰한 여행을 위해서는 마카오 현지 교통카드인 마카오 패스는 필수품이다. 하루에 대 여섯 번 환승하며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하루 2만보 이상을 걸었다. 등에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서 1836년 15세의 중학교 2학년생이 되어 김대건 신부와 함께 선교여행이 시작된다. 인천공항에서 3시간 정도 비행하여 오후 2시경에 마카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한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서 어마무시한 파리지앵 호텔에 도착해서 여장을 풀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묵게되는 파리지앵 호텔. 수많은 세계각지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마치 명절 전날의 양동시장을 방불케 했다.
휘황찬란하고 호화스런 호텔 방도 수천 개에 이르러서 찾을 수 없는 미로의 방 파리지앵 호텔의 휴식을 뒤로 한 채, 오후 4시경 한국 최초의 카토릭 사제 김대건 신부 동상 앞에 묵상하기 위해 카모이스 공원을 도착했다.
[김대건 신부 이야기] 조선시대에 박해를 감내하며 카톨릭으로 개종한 신부님은 1821년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에 카톨릭이 전래된 것은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으며, 그 시대 조선의 쇄국 정책으로 어려움이 많았으며,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굳건한 믿음과 헌신으로 신앙을 유지하며,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1836년 열다섯 나이의 김대건은 신학교 수학을 위해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머나먼 마카오 여정속의 유학길을 떠나게 된다. 한창 어린 나이 부모님께 어리광부리며 투정 거리는 열다섯 살 나이에 사도의 길을 걷게 되는 소년이었다.
마카오까지의 여정은 젊은 세 신학생의 굳건한 신앙심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며 종교 교육을 받기 위한 어려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파리 외방 선교회 선교사 사제 양성을 위해 “너는 하나님께서 세워진 사람이다”. 라며 집안교육을 받고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서 쉽지 않는 삶. 조선인 사제가 없던 시대에 오직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박해를 피해서 살아온 정약용. 또 그의 형 정약전은 예비사제를 생각하며 압록강까지 길잡이를 해 줌으서 세 사람의 유학생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1837년 3월에 시작된 세 사람의 여정은 압록강을 건너 거대한 중국대륙을 걸어서 마카오까지 약 6개월이 걸리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한국에서 마카오까지 건너갈 때 끝도 없이 산길, 바닷길을 넘어서 배고픔을 달래가며 허술한 나룻배에 가냘픈 몸을 맡기고 거친 폭풍우 속에서도 배고픔을 참아내며 6개월 동안의 기나긴 피눈물 나는 여정이었다. 불행하게 일행중 한명인 최방제는 질병으로 여정 중간에 사망했다. 김대건은 하나님의 인도로 마카오까지 무사히 도착해서 불굴의 투지력으로 사제의 꿈을 이룰 수가 있었다.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 이야기] 모리슨 예배당 및 구 프로테스탄트 공동묘지 방문 순례 묵상을 마쳤다. 중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입국한 스코틀랜드장로교 기독교 선교사 모리슨은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집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모리슨 어머니는 기도하는 습관을 가르치고 성경을 끊임없이 들려주었다고 한다. 14세에 학교를 졸업한 모리슨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신발 가계에서 일했다. 사춘기에 이른 모리슨은 잠시나마 비행의 길을 걷기도 했다. 그러던중 무분별한 생활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16살이 되어 회개하고 돌아왔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그리스도가 흘린 십자가 보혈을 진심으로 받아들게 된 것이다. 모리슨은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업을 이어 갔다. 하지만 모리슨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대부분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 즉, 기도로 채웠다. 모리슨은 인간이 죄지은 댓가로 영원한 형벌인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가 쏟은 보혈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넘쳤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가득 차서 예수를 전혀 모르는 지역에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며 선교하기로 마음 먹게 된 것이다.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는 52세의 짧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마카오는 한국보다 한시간 늦다. 아주 오래전부터 한-중간 교역이 활발했고,
현재 마카오에도 한국 관광객이 상당히 많다. 호텔 1층 로비에는 화려한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바닥은 포르투칼식 칼사마방식 흰색 검은색으로 번갈아 가면서 바다물결 모양의 별 모양과 자연석 돌을 이용해 타일이 정교하게 붙여져 있다. 포르투칼 카먼성화 벽화등 교회벽 장식도 섬세하다. 아름다운 색채 감각이 뛰어나 보인다. 밤8시 야경투어가 시작되었다. 야경이 화려한 네온사인과 조명으로 휘황찬란해서 눈이 부시다. 화려한 쇼와 공연 고급식당과 쇼핑몰 등이 소돔과 고모라성을 방불케한다. 가난한 동네를 한바퀴 순회한 후, 디저트 마을 카페에서 달달한 우유 푸딩, 아이스 차 및 과일 쥬스를 마셨다.
♡4월 1일(화) 김대건 신부의 길, 모리슨 선교사의 길을 따라나섰다. 9시에 성 안토니오 성당, 성 바울성당 유적, 마카오 박물관 몽테 요새, 성 요셉 성당과
세미나리를 방문했다. 김대건 신부와 아시아 선교 역사 탐방 세미나리 내부 전시관 관람하고 점심은 황지기 웡치케이 새우완탕 계란새우덮밥. 맛이 일품이었다. 오후 2시쯤에 세나도 광장 인근 성 도밍고 성당 민정청사 등 유네스코 문화유산 탐방하고, 타이파빌리지 방문을 했다. 저녁 식사엔 야경 투어가 시작 되었다. 마카오는 중국 남부 해안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인구 약 71만 명으로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중 하나이다. 16세기 중반부터 포르투갈이 차지하여 1999년 중국에 반환되기까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다. 도시 곳곳에는 포르투갈 중국 양쪽 문화 건축 양식이 어우러진 풍경이 남아 있으며 2005년에는 마카오 역사지구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마카오는 전통적으로 어업과 무역으로 생계를 이어왔으나 현재는 관광과 카지노 산업이 압도적으로 지배적이다. 경제가 특정산업에 치우쳐 빈부 격차와 사회문제도 존재하며 정부는 산업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 마카오 타워는 마카오 도심 중앙에 위치하며 황금빛 건물이 휘황찬란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4월 2일(수) 마카오의 빛과 그림자 쉐나도 광장 까몽에스 시민공원에는 마카오에 바로 까몽에스 탑이 있다. 포르투갈 민족시인 까몽에스 동상에 새겨진 포르투칼 민족혼을 담은 시, ‘여기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육지는 끝나지만, 대서양의 바다가 시작된다는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민족정신이 담아있는 시, 이베리아 반도 서쪽 맨 끝에 위치하고 있어 유럽으로 진출을 못하는 포르투칼. 오직 바다로 밖에 나갈수 없는 상황, 또는 지중해는 이슬람이 강했다. 우리는 어쩌냐? 미지의 불확실한 바다로 나가 볼까? 하고 항로 개척하면서 아프리카 희망봉을 발견했다. 희망봉을 돌아가니 인도가 나와 인도항로를 개척하였다.
도심 가운데에 있는 성 바울 성당은 화재로 인해 전소되었다. 1940년 포르투갈 독재에 맞서 젊은 청년과 군인들이 혁명을 일으키는데 시민들이 지지했다. 1974년 4월경에 카네이션 혁명으로 포르투칼의 식민지를 모두 포기했다. 카모이스 공원 안에 김대건 신부 청동상 아래 한국어. 중국어. 영어로된 비문이 설치되어 삶과 업적을 소개하고 있다. 앞에서 전통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젊은 청년 김대건 모습앞에 모두들 경건한 마음으로 성령님 도우심 안에 묵상을 드렸다. 2021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적지에 선정되었다. 2001년에 완공된 338미터 높이의 마카오 타워. 도시 어디서나 보이는 랜드마크로 중국본토까지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마카오 타워에는 360도 회전식 레스토랑이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최후의 만찬을 예수님과 함께 기쁨의 잔치에 참여했는데 보암직스러운 빨주노초파남보 색색이 오색백과 달콤한 크림종류 빵과 초콜렛 종류 등등, 보기만 해도 신기하게도 군침이 돈다. 쇼핑몰,영화관이 있고 특히 타워 외벽에서 뛰어 내리는 번지점프.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 조선 지도를 제작한 김정호 대동여지도보다 15년이나 앞섰다고 하며, 그 지도를 마카오의 리브와 신부에게 보내어
조선의 선교활동을 위한 지리정보를 제공하였다. 우리나라 110명이 넘는 성인중에 한명이 제주도에 도착하여 첫 예배를 드렸고, 육지로 들어와서 붙잡혔다고 한다. 조선후기 정권의 보수 세력이 선교사들의 지도를 보고 간첩 행위로 몰아서 순교를 당하게 된다. 김대건 신부는 25세에 순교 당하셨다. 서울 새남터 용산역 왼편 모래사장 현재 새남터 성당. 김대건 신부의 사형집행, 열두 명을 누가 죽였는지 모른다. 많은 순교를 거쳐서 나비효과처럼 나에게 온 믿음의소식들. 사도적 거룩한 교회의 네가지 기본중심. 만 25세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 영원한 청년, 스승이자 조선 카톨릭의 아버지. 친구이며 동생이며 신앙의벗. 신앙의 길벗이며 멘토이시며 그 여정 속에 우리 모두 신앙의 굳건함과 십자가 만 바라보며 인내와 말씀과 기도 속에 중요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보여주는 표상이며 십자가의 사랑을 만나는 이들에게 지구 끝까지 사도바울처럼 전도자가 되기를 주님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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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자 권사
2025년3월31일. 마카오 선교여행팀은 새벽 3시30분에 교회주차장에서 출발하였다. 차창가에 다가가 보니 바닷가 위에 달덩이 같은 어마어마한 천지창조 신기한 신새벽 둥근 해가 떠오르고 있다. 인천공항은 멀기도하다.
정준 목사님의 인솔로 인천공항에 가고 있다. 드디어 홍콩 마카오 일정이 시작되었다. 심성 고운신 어느 집사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63년 만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말씀을 자세히 들어보니까 자랑스럽기도 하였다. 남편이 퇴직후엔 나와 함께 선교여행을 약속했지만 마카오 여정에 함께 하지 못해 애잔함이 남아있던 참이었는데, 마침 옆자리에 앉은 마음씨 착한 정권사는 “남편이랑 왜 함께 오시지 않았어요?” 하고 따뜻한 위로의 마음을 전해준다.
오전 7시 5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교통수단은 시내버스와 호텔버스를 이용했다. 알뜰한 여행을 위해서는 마카오 현지 교통카드인 마카오 패스는 필수품이다. 하루에 대 여섯 번 환승하며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하루 2만보 이상을 걸었다. 등에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서 1836년 15세의 중학교 2학년생이 되어 김대건 신부와 함께 선교여행이 시작된다. 인천공항에서 3시간 정도 비행하여 오후 2시경에 마카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한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서 어마무시한 파리지앵 호텔에 도착해서 여장을 풀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묵게되는 파리지앵 호텔. 수많은 세계각지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마치 명절 전날의 양동시장을 방불케 했다.
휘황찬란하고 호화스런 호텔 방도 수천 개에 이르러서 찾을 수 없는 미로의 방 파리지앵 호텔의 휴식을 뒤로 한 채, 오후 4시경 한국 최초의 카토릭 사제 김대건 신부 동상 앞에 묵상하기 위해 카모이스 공원을 도착했다.
[김대건 신부 이야기] 조선시대에 박해를 감내하며 카톨릭으로 개종한 신부님은 1821년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에 카톨릭이 전래된 것은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으며, 그 시대 조선의 쇄국 정책으로 어려움이 많았으며,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굳건한 믿음과 헌신으로 신앙을 유지하며,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1836년 열다섯 나이의 김대건은 신학교 수학을 위해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머나먼 마카오 여정속의 유학길을 떠나게 된다. 한창 어린 나이 부모님께 어리광부리며 투정 거리는 열다섯 살 나이에 사도의 길을 걷게 되는 소년이었다.
마카오까지의 여정은 젊은 세 신학생의 굳건한 신앙심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며 종교 교육을 받기 위한 어려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파리 외방 선교회 선교사 사제 양성을 위해 “너는 하나님께서 세워진 사람이다”. 라며 집안교육을 받고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서 쉽지 않는 삶. 조선인 사제가 없던 시대에 오직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박해를 피해서 살아온 정약용. 또 그의 형 정약전은 예비사제를 생각하며 압록강까지 길잡이를 해 줌으서 세 사람의 유학생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1837년 3월에 시작된 세 사람의 여정은 압록강을 건너 거대한 중국대륙을 걸어서 마카오까지 약 6개월이 걸리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한국에서 마카오까지 건너갈 때 끝도 없이 산길, 바닷길을 넘어서 배고픔을 달래가며 허술한 나룻배에 가냘픈 몸을 맡기고 거친 폭풍우 속에서도 배고픔을 참아내며 6개월 동안의 기나긴 피눈물 나는 여정이었다. 불행하게 일행중 한명인 최방제는 질병으로 여정 중간에 사망했다. 김대건은 하나님의 인도로 마카오까지 무사히 도착해서 불굴의 투지력으로 사제의 꿈을 이룰 수가 있었다.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 이야기] 모리슨 예배당 및 구 프로테스탄트 공동묘지 방문 순례 묵상을 마쳤다. 중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입국한 스코틀랜드장로교 기독교 선교사 모리슨은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집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모리슨 어머니는 기도하는 습관을 가르치고 성경을 끊임없이 들려주었다고 한다. 14세에 학교를 졸업한 모리슨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신발 가계에서 일했다. 사춘기에 이른 모리슨은 잠시나마 비행의 길을 걷기도 했다. 그러던중 무분별한 생활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16살이 되어 회개하고 돌아왔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그리스도가 흘린 십자가 보혈을 진심으로 받아들게 된 것이다. 모리슨은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업을 이어 갔다. 하지만 모리슨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대부분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 즉, 기도로 채웠다. 모리슨은 인간이 죄지은 댓가로 영원한 형벌인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가 쏟은 보혈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넘쳤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가득 차서 예수를 전혀 모르는 지역에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며 선교하기로 마음 먹게 된 것이다.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는 52세의 짧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마카오는 한국보다 한시간 늦다. 아주 오래전부터 한-중간 교역이 활발했고,
현재 마카오에도 한국 관광객이 상당히 많다. 호텔 1층 로비에는 화려한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바닥은 포르투칼식 칼사마방식 흰색 검은색으로 번갈아 가면서 바다물결 모양의 별 모양과 자연석 돌을 이용해 타일이 정교하게 붙여져 있다. 포르투칼 카먼성화 벽화등 교회벽 장식도 섬세하다. 아름다운 색채 감각이 뛰어나 보인다. 밤8시 야경투어가 시작되었다. 야경이 화려한 네온사인과 조명으로 휘황찬란해서 눈이 부시다. 화려한 쇼와 공연 고급식당과 쇼핑몰 등이 소돔과 고모라성을 방불케한다. 가난한 동네를 한바퀴 순회한 후, 디저트 마을 카페에서 달달한 우유 푸딩, 아이스 차 및 과일 쥬스를 마셨다.
♡4월 1일(화) 김대건 신부의 길, 모리슨 선교사의 길을 따라나섰다. 9시에 성 안토니오 성당, 성 바울성당 유적, 마카오 박물관 몽테 요새, 성 요셉 성당과
세미나리를 방문했다. 김대건 신부와 아시아 선교 역사 탐방 세미나리 내부 전시관 관람하고 점심은 황지기 웡치케이 새우완탕 계란새우덮밥. 맛이 일품이었다. 오후 2시쯤에 세나도 광장 인근 성 도밍고 성당 민정청사 등 유네스코 문화유산 탐방하고, 타이파빌리지 방문을 했다. 저녁 식사엔 야경 투어가 시작 되었다. 마카오는 중국 남부 해안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인구 약 71만 명으로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중 하나이다. 16세기 중반부터 포르투갈이 차지하여 1999년 중국에 반환되기까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다. 도시 곳곳에는 포르투갈 중국 양쪽 문화 건축 양식이 어우러진 풍경이 남아 있으며 2005년에는 마카오 역사지구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마카오는 전통적으로 어업과 무역으로 생계를 이어왔으나 현재는 관광과 카지노 산업이 압도적으로 지배적이다. 경제가 특정산업에 치우쳐 빈부 격차와 사회문제도 존재하며 정부는 산업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 마카오 타워는 마카오 도심 중앙에 위치하며 황금빛 건물이 휘황찬란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4월 2일(수) 마카오의 빛과 그림자 쉐나도 광장 까몽에스 시민공원에는 마카오에 바로 까몽에스 탑이 있다. 포르투갈 민족시인 까몽에스 동상에 새겨진 포르투칼 민족혼을 담은 시, ‘여기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육지는 끝나지만, 대서양의 바다가 시작된다는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민족정신이 담아있는 시, 이베리아 반도 서쪽 맨 끝에 위치하고 있어 유럽으로 진출을 못하는 포르투칼. 오직 바다로 밖에 나갈수 없는 상황, 또는 지중해는 이슬람이 강했다. 우리는 어쩌냐? 미지의 불확실한 바다로 나가 볼까? 하고 항로 개척하면서 아프리카 희망봉을 발견했다. 희망봉을 돌아가니 인도가 나와 인도항로를 개척하였다.
도심 가운데에 있는 성 바울 성당은 화재로 인해 전소되었다. 1940년 포르투갈 독재에 맞서 젊은 청년과 군인들이 혁명을 일으키는데 시민들이 지지했다. 1974년 4월경에 카네이션 혁명으로 포르투칼의 식민지를 모두 포기했다. 카모이스 공원 안에 김대건 신부 청동상 아래 한국어. 중국어. 영어로된 비문이 설치되어 삶과 업적을 소개하고 있다. 앞에서 전통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젊은 청년 김대건 모습앞에 모두들 경건한 마음으로 성령님 도우심 안에 묵상을 드렸다. 2021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적지에 선정되었다. 2001년에 완공된 338미터 높이의 마카오 타워. 도시 어디서나 보이는 랜드마크로 중국본토까지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마카오 타워에는 360도 회전식 레스토랑이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최후의 만찬을 예수님과 함께 기쁨의 잔치에 참여했는데 보암직스러운 빨주노초파남보 색색이 오색백과 달콤한 크림종류 빵과 초콜렛 종류 등등, 보기만 해도 신기하게도 군침이 돈다. 쇼핑몰,영화관이 있고 특히 타워 외벽에서 뛰어 내리는 번지점프.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 조선 지도를 제작한 김정호 대동여지도보다 15년이나 앞섰다고 하며, 그 지도를 마카오의 리브와 신부에게 보내어
조선의 선교활동을 위한 지리정보를 제공하였다. 우리나라 110명이 넘는 성인중에 한명이 제주도에 도착하여 첫 예배를 드렸고, 육지로 들어와서 붙잡혔다고 한다. 조선후기 정권의 보수 세력이 선교사들의 지도를 보고 간첩 행위로 몰아서 순교를 당하게 된다. 김대건 신부는 25세에 순교 당하셨다. 서울 새남터 용산역 왼편 모래사장 현재 새남터 성당. 김대건 신부의 사형집행, 열두 명을 누가 죽였는지 모른다. 많은 순교를 거쳐서 나비효과처럼 나에게 온 믿음의소식들. 사도적 거룩한 교회의 네가지 기본중심. 만 25세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 영원한 청년, 스승이자 조선 카톨릭의 아버지. 친구이며 동생이며 신앙의벗. 신앙의 길벗이며 멘토이시며 그 여정 속에 우리 모두 신앙의 굳건함과 십자가 만 바라보며 인내와 말씀과 기도 속에 중요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보여주는 표상이며 십자가의 사랑을 만나는 이들에게 지구 끝까지 사도바울처럼 전도자가 되기를 주님께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