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길(전)
by kanghk612 · 2025-09-03 21:08
광주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온 집안과 가족들의 기대와 사랑 속에 성장했다. 어머니 의 교육에 대한 일정과 집님으로 광주사범부속초등학교를 거쳐 광주서중, 서울고등학교까지 12년 과정을 연속 개근상과 우등상을 받으며 모범생으로 졸업했다. 대학은 서울대 사범대학 지구과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자유분방한 대학 생활을 마치고 해남고등학교에 첫발을 내팀은 후 1975년 금호고등학교로 웃겨 근무하다 1989년 전교조 가입을 이유로 해직틴다. 1994년 전남고등학교에 복직하여 전남여고 등을 거처 2008년 송장중학교에서 정년을 맞았다. 내가 근무하던 금호고등학교는 고유의 교사문화가 존재했을 만큼 전강한 사학으로 교사들의 .자른감이 높았다. 또한 당시 운행하던 교사 처용 시 받던 기부금 파동 같은 일들이 일절 없었 다. 하지만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과 경쟁교육의 소용률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교육운동이 시작되면서 교사럼의회가 태둥되고 80년 5월 전교조가 클별했다. 하지만 집행부 대다수가 수 공백 상활을 타개하기 위해 89년 7월 9일 여의도에서 전국교사대회가 열린다. 서, 신정정량서 등에 불법 교사가 금호고등학교에서는 11명의 연장된다. 참가하게 되는데, 참가자 전원이 증로경찰서와 영등포경찰지 이어 조기 여름방학에 들어가면서 나를 포함해 9평의 교사가 해직의 김을 같게 된다. 솔직 히 나는 해직을 감수할 만큼 교육관이 투철한 교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해직을 감수하겠다고 나선 후배 교사들을 남겨두고 차마 나 혼자 들아같 수는 없었다. 가장 연장자였던 선배교사로 서 또 여린 양심을 가진 할 인간으로서 해직의 김을 검을 수밖에 없었다. 복직이 쉽사리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다가왔다. 휴직이 되자 당시 두 아이를 든 가장으로서 당장 눈앞에 경제적 타점이 무섭게 했다. 이 련 상황에서 건속관련 작은 회사를 차려 광주 호남동성당과 나주 노안성당 원애원 공소의 건 축 개보수 공사를 정말 열과 성을 다해 마무리했다. 처음 시작과는 달리 상황은 녹록치 않았 고 경험 부착과 경제적으로 소음이 되치 않아 결국 1년여 만에 페연의 길을 밝게 된다. 마지 막 선택향으로 입시학원에서 강차로 생산을 영위하다 1904년 전남고등학교에 복직하게 틴다. 복직 후 가장 어려웠던 것은 판리자들의 편전과 차별이었다. 해직교사라는 딱지가 주흥글씨 처럼 작용한 탓인지 연설 적용은 쉽지만은 않았지만, 전남고 시절 만나 7년여를 우정을 쌍은 원어민 교사 Michal Walsh의 인연을 있을 수 없다. 학교에서 노 교사 속에 드는 내가 비록 유창하지는 않지만 원어민 교사와 유쾌하게 대학를 나누는 모습은 신선한 모습으로 보였는지 주변 동료 교사와 후배 교사들도 차층 내게 다가와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이런 정험을 바탕 으로 이후 전남여고와 두암중 그리고 충장중에서 정년을 맞을 때까지 나는 늘 적극적이고 궁 정적인 자세로 사람을 대하고 삶을 바라보게 되었다.